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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겨우 아흔한살일 뿐이었는데, 할머니는 백살도 넘어보였다. 지난주 목요일에 병원에 가서 만난 할머니 모습이 그러했다. 6년을 누워지낸 우리 외할머니는 오늘 당신 이름의 비석을 세우고, 무덤을 가졌다. 나는 생전 처음 검은 상복을 입고, 그런 할머니를 배웅 다녀왔다. 외가 친척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기는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았다. 2박 3일 동안 머물렀던 인하대학병원 장례식장 6호실은 다행히 현대적인 시설에 몹시 깨끗했다. 그래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니 조금씩 때가 묻었다. 간간이 아기 울음 소리가 났고, 어울리지 않게 웃음소리도 났다. 외삼촌은 그래도 호상이니까 너무 울지 말라고 그러셨다. 아흔한살이 되도록 살아서 증손주들도 여럿 보고 가셨다고,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내가 몇 번이고 갔었던 다른 친구의 장례식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문상 오는 손님들이 뜸할 때는 상주들이 모여앉아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시콜콜 수다 끝에 손님이 또 이어지면 벌떡 일어나서 다들 손을 모으고 절을 했다. 마치 시트콤 같지 않냐며 나보다 네살 어린 사촌동생과 키득키득거렸다. 마지막날 밤에는 나도 그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이면,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장지인 포천의 금주공원묘지에 있는 외할아버지 산소 곁에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기 위해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거의 대부분의 가족들이 장례식장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가 새벽 4시쯤 마루바닥에 너나할 것 없이 쓰러져 1시간 정도 새우잠을 단체로 잤다. 그리고 5시 반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발인 준비를 했다. 할머니는 2009년 7월 28일 새벽 0시 50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여섯 자식 중에 다섯번째인 우리 엄마는 본인 표현대로 무척이나 감사하게도 그 자리를 지켰다. 아마 십년이 넘어도, 그 얘기를 계속하실 것 같다. 엄마는 이십여년 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에도 그 자리를 지키다가 아주 잠깐 자리를 비운 새에 세상을 뜨신 걸 무척 원통해하셨기 때문에, 외할머니 마지막 숨은 꼭 곁에서 보고 싶어하셨다. 그리고 엄마 말로는, 27일 밤 10시쯤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외할머니께 갔다가 이번에는 마치 밤새 곁에 있어달라는 듯한 간절한 할머니의 눈 때문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병원에 머무르고 말았단다. 그래서 다행히 외할머니는 혼자 있지 않았단다. 정신도 온전하지 않은, 그저 남일 뿐인 사람들이 여럿인 병실에서 내 가족 손을 못잡고 그냥 떠나면 얼마나 외롭겠냐는게 우리 엄마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외할머니께서 우리 엄마를 걱정해 그리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저리 서럽게 우는 사람을, 마음 편히 두고 가기 어려웠겠지. 조문객이 많이 왔는데, 어제 밤에 대구에서 할머니의 아주 오랜 가족들이 찾아왔다. 온 식구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한참을 숙연해했다. 외할머니의 여동생이 왔다. 나에게는 이모할머님이 되시는데, 딸과 사위가 모시고 멀리서 차를 끌고 왔더라. 우리는 하룻밤을 지낸터라 많이 진정이 되어 있었는데, 이모할머님은 도착하시어 영정사진을 보고난 후에야 떠난 것을 정말 깨닫고, 곡을 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 두 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일제시대를 지나고, 육이오를 지나고, 아주 어렵게 세상을 살아남은 분들이어서 이야기가 많았다. 아흔한살의 언니를 보내는 여동생은 너무 늙어 '자매'라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어색한지, 우는 그 모습이 낯설어 한참을 종종 거렸다. 나는 그 뒤에서 또 울어버렸다. 우리 엄마보다 더 눈물이 많은 막내이모는 그 자식들이 중국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외할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소식에 한국에 방학보다 일찍 들어와있었다. 내게 사촌동생이 되는 그 남매는, 어려서 외할머니께서 맞벌이하는 사위와 딸 대신 밥을 해 먹이고, 유치원을 보내고, 학교를 보냈었다. 무엇이 가장 오래된 기억이더냐 물으니, 밥해주는 모습만 기억이 난다고 하더라. 그리고 살갑게 안아주던 할머니가 너무 오랫동안 아팠던 것이 가슴 아팠는데, 이제는 더 볼 수 없어 자꾸 눈물이 났다. 다리를 다치지만 않았어도, 좀 더 건강하게 살아 계실 수 있었을텐데- 이제와 지난 얘기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지만 거동하지 못하는 할머니께 나는 너무나 무심한 손녀딸이었다. 좀 더 안아줄 것을,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을, 내가 꼭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할머니였는데, 나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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