텟팬에 한번 더 갔다. 곧 거제도로 내려간다는 후배에게 그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역시 아슬아슬하게 테이블에 앉았다. 우리가 착석한 후에는 웨이팅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천히 메뉴를 고르고, 이번에도 아사히 생맥주를 시켰다. 안주는 오사카풍 오코노미야키와 연어알, 연어가 들어간 솥밥을 주문했다. 후배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천천히 익숙해져갔다. 입장하는 손님에게 "어서오십시오"라고 흥겹게 인사하는 적어도 여덟명 이상의 사내 조리사들의 목소리에 곧 길들여진다.
옛날 이야기를 했다. 그 작고 작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어떻게 연애가 꼬이고 꼬이는지를 이야기했고, 그때는 후배가 몰랐었을 숨겨진 이야기들을 했다. 그리고 나도 짐작만 하고 있었던 그 후배가 알고있는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몇 년만에 만났지만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낄낄대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결국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은 분홍색 지갑도 부러 꺼내어서 구경시키고,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그 사람의 얼굴도 보여주었다. 후배는 아마 짐작도 하지 못하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겨울에 얼마나 따뜻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부럽다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7년전에는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때 지금의 이런 모습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더라면 나는 훨씬 더 어른스럽게 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몰랐고, 아주 어리석었기 때문에 그 녀석을 몹시 좋아했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어른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그 나이에 가장 어울리는 풋내나는 짝사랑을 했었다. 그리고 그 녀석도 내 마음을 내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참 잘 어울려다녔다. 그때도 그랬지만 좋아하는 것이 많이 닮았다. 그 녀석과 나는 내 동기인 JJH를 똑같이 좋아했고, 셋이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만큼 완전한 시간도 드물었다. 술은 잘 못마시면서 새벽까지 길게 길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씨네큐브에서 보는 헐렁한 영화를 좋아했고, 그래서 둘이서 영화를 보러 가도 불편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오늘 만나서도 유일하게 좋아하는 미드가 '그레이 아나토미'이고, 이미 '섹스앤더시티'를 다 봤고, 최근 좋아했던 우리나라 드라마는 '그들이 사는 세상'이고, 요즘 보는 일본 드라마는 우에노 쥬리가 나오는 드라마였다. 뭐, 그런 것만 닮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 어려워하는 것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도, 소외받는 사람에게 항상 시선이 먼저 가는 것도 여전히 닮았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것들을 자꾸 자꾸 확인했다.
하지만 단지 닮았을 뿐이다. 예전에는 그러한 동질감이, 연민이, 호감이 되어 좋아한다는 마음이 되었지만 오늘은 그게 꼭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예전처럼 두근거리거나, 쑥스럽거나, 설레이지가 않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이야기해주면서 그 애가 잘 이해해주는 것이 반가웠을 뿐,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더라도 서운하지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짝사랑을 이렇게 덤덤하게 마주할 수 있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이다. 내가 그 애를 한참 좋아할 때 그 애는 사랑에 관심이 없어했었는데, 지금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고, 좋아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래서 명령해주었다. 얼른 연애하라고. 지금 이 순간만큼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적합한 시간은 또 없으니까, 지금 당장 사랑할 사람을 찾아 나서라고 얘기해주었다. 늘 준비하고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그 타이밍에 아주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지만, 언젠가 준비하면 되겠지뭐 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타이밍은 절대 오지 않는 법이니까. 재밌는 건, 요즘 대화하게 되는 젊은 남성들의 대부분은 일자리를 구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에 치여서 '이렇게 일하다보면 적당한 나이가 되어 경제력을 갖추었을 때쯤, 좋은 사람이 나타나겠지.뭐'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그런데 그 때쯤 되면 늙고 지쳐서(?) 두근두근한 연애나 온통 정신을 다 버리는 사랑은 몹시 피곤한 일로만 생각되지 않을까? 지금 연애하지 않으면, 적당히 연애할 수 있는 나이란 절대 오지 않는다.
후배와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얘기해주었다. 질투하지 마세요, 전혀 떨리지가 않더랍니다. 내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당신도 어여쁜 후배를 만날 요량이라면 밤 11시까지만 커피와 대화를 나누고, 꼭 저에게 전화를 하십시오. 그러면 저도 질투하지 않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