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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단기 알바하기 0일차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발견한, 추석 단기 아르바이트. 도서관에 가는 길에 들러볼까 하고, 설렁설렁 걸어갔다. 그 앞에 도착해서 담당자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더니, 어떤 젊은 여성이 전화를 받는다. 이력서를 가져왔다고 하니까, 들어오라고 하여 물어 물어 직원 출입구까지 갔다.
출입구로 들어가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이름 붙이자면, 음. 마트 속에 숨어있는 거대한 인력시장이랄까. 직원들의 사무실은 생각보다 작고, 임시근무자들(단기, 장기 아르바이트생)의 세상이 거기 있었다. 사무실과 여직원 탈의실, 여직원 휴게실, 화장실이 각각 있었지만 그 사이를 오가는 복도는 좁고, 복도 한 벽에는 음료수 자판기와 커피 자판기가 나란히 있어서, 좁은 복도를 더욱 좁게 하고 있었다. 직원 출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계단이 나오는데 한 스무개쯤 되는 계단을 내려갈 때는 왼쪽 벽에 '이 달의 친절사원'이라고 하여 매월 추천(이 된건지, 당첨이 된건지 모르겠지만)된 사원의 손바닥 보다 더 큰 사진이 액자에 끼워져 걸려있었다. 사무실 앞에는 소위 보안요원이 서 있었는데, 보안요원이라고해서 꼭 덩치가 크고 험상궂게 생긴것은 아니다. 교대로 근무를 하는지, 매일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일주일을 넘게 일하니 어떤 사람은 굉장히 예의바르고, 어떤 사람은 무뚝뚝하고 또 어떤 사람은 늘 졸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안요원을 보고, 보안요원이라고 한 눈에 딱 알 수 있는 것은 생김새보다는 그가(혹은 그녀가)어깨에 두르고 있는 작은 몽둥이와 총 때문이다. (이게 총인지, 아닌지, 몽둥이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한번 물어보고 싶지만, 그럴 분위기가 결코 아니다!)크지는 않지만, 적당히 위압감을 가지고 있어서 무언가 물어보기 좀 곤란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평상복을 입고 두리번 거리는 나에게 먼저 그 보안요원이 질문을 했다. "어떻게 오셨죠?"
... 걸어왔다고 대답하면, 이 사람이 어의없어 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추석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 이력서를 내러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어떤 팀장을 찾는거냐고 물어서, 다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전화를 받은 그 사람이 전화를 받아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인력관리를 하는 담당자는 마침 휴무일이어서 자리를 비웠고,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다른 직원이 나에게 '전혀 간단하지 않은, 심지어 가족들의 졸업 고교 이름까지 적으라고 시키는' 입사지원서를 작성하라고 주문했다. 적고 싶지 않은 것은 적지 않은 채로, 후루룩 작성하여 내밀었더니 사진을 붙이란다. 몇 일전에 단발머리를 한 기념으로 찍은 반명함판 사진을 붙였다.
두고 가란다. 담당자가 내일 출근하면, 이력서를 보고나서 전화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조금 이상한 그 세계를 스무개쯤의 계단을 통해서 다시 나오려고 하는데, 아까 나를 불러세웠던 그 보안요원이 퇴근했는지, 다른 보안요원이 나에게 가방검색을 요구했다. 고압적이지도 않지만, 다부지게 말해서 나는 스스럼없이 가방을 열어 보여주었다. 내가 너무 천진한 표정이었을까, 다소 겸연쩍은 표정으로 업무 규정이 적힌 책자 같은 것을 들어보여주면서 늘 이렇게 하는 거라고 긁적긁적 설명을 한다. 내 가방에는 보여주지 못할 만한 것은 없으니까, 보여주긴 했지만 이것은 사생활 침해가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예전 직장에서는, 출판사에 드나드는 직원들이 책을 집어가진 않는지, 가방을 열어 확인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뉴스에서 <인도네시아 소수 민족 한글 공용어 채택>자막을 보고난 뒤, 어머니 말씀, "인도네시아가 인도랑 다른 거랬지?" 딸, "응" 어머니 말씀, "이번에 동생네 오는 애들이 인도네시아 사람이라그랬나?" 딸, "응" 아버지 말씀, "시골에 아랫집 사는 OO가 인도 산다니까그래." ..... 어쩌면 겨우 아흔한살일 뿐이었는데, 할머니는 백살도 넘어보였다. 지난주 목요일에 병원에 가서 만난 할머니 모습이 그러했다. 6년을 누워지낸 우리 외할머니는 오늘 당신 이름의 비석을 세우고, 무덤을 가졌다. 나는 생전 처음 검은 상복을 입고, 그런 할머니를 배웅 다녀왔다. 외가 친척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기는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았다. 2박 3일 동안 머물렀던 인하대학병원 장례식장 6호실은 다행히 현대적인 시설에 몹시 깨끗했다. 그래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니 조금씩 때가 묻었다. 간간이 아기 울음 소리가 났고, 어울리지 않게 웃음소리도 났다. 외삼촌은 그래도 호상이니까 너무 울지 말라고 그러셨다. 아흔한살이 되도록 살아서 증손주들도 여럿 보고 가셨다고,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내가 몇 번이고 갔었던 다른 친구의 장례식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문상 오는 손님들이 뜸할 때는 상주들이 모여앉아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시콜콜 수다 끝에 손님이 또 이어지면 벌떡 일어나서 다들 손을 모으고 절을 했다. 마치 시트콤 같지 않냐며 나보다 네살 어린 사촌동생과 키득키득거렸다. 마지막날 밤에는 나도 그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이면,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장지인 포천의 금주공원묘지에 있는 외할아버지 산소 곁에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기 위해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거의 대부분의 가족들이 장례식장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가 새벽 4시쯤 마루바닥에 너나할 것 없이 쓰러져 1시간 정도 새우잠을 단체로 잤다. 그리고 5시 반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발인 준비를 했다. 할머니는 2009년 7월 28일 새벽 0시 50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여섯 자식 중에 다섯번째인 우리 엄마는 본인 표현대로 무척이나 감사하게도 그 자리를 지켰다. 아마 십년이 넘어도, 그 얘기를 계속하실 것 같다. 엄마는 이십여년 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에도 그 자리를 지키다가 아주 잠깐 자리를 비운 새에 세상을 뜨신 걸 무척 원통해하셨기 때문에, 외할머니 마지막 숨은 꼭 곁에서 보고 싶어하셨다. 그리고 엄마 말로는, 27일 밤 10시쯤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외할머니께 갔다가 이번에는 마치 밤새 곁에 있어달라는 듯한 간절한 할머니의 눈 때문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병원에 머무르고 말았단다. 그래서 다행히 외할머니는 혼자 있지 않았단다. 정신도 온전하지 않은, 그저 남일 뿐인 사람들이 여럿인 병실에서 내 가족 손을 못잡고 그냥 떠나면 얼마나 외롭겠냐는게 우리 엄마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외할머니께서 우리 엄마를 걱정해 그리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저리 서럽게 우는 사람을, 마음 편히 두고 가기 어려웠겠지. 조문객이 많이 왔는데, 어제 밤에 대구에서 할머니의 아주 오랜 가족들이 찾아왔다. 온 식구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한참을 숙연해했다. 외할머니의 여동생이 왔다. 나에게는 이모할머님이 되시는데, 딸과 사위가 모시고 멀리서 차를 끌고 왔더라. 우리는 하룻밤을 지낸터라 많이 진정이 되어 있었는데, 이모할머님은 도착하시어 영정사진을 보고난 후에야 떠난 것을 정말 깨닫고, 곡을 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 두 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일제시대를 지나고, 육이오를 지나고, 아주 어렵게 세상을 살아남은 분들이어서 이야기가 많았다. 아흔한살의 언니를 보내는 여동생은 너무 늙어 '자매'라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어색한지, 우는 그 모습이 낯설어 한참을 종종 거렸다. 나는 그 뒤에서 또 울어버렸다. 우리 엄마보다 더 눈물이 많은 막내이모는 그 자식들이 중국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외할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소식에 한국에 방학보다 일찍 들어와있었다. 내게 사촌동생이 되는 그 남매는, 어려서 외할머니께서 맞벌이하는 사위와 딸 대신 밥을 해 먹이고, 유치원을 보내고, 학교를 보냈었다. 무엇이 가장 오래된 기억이더냐 물으니, 밥해주는 모습만 기억이 난다고 하더라. 그리고 살갑게 안아주던 할머니가 너무 오랫동안 아팠던 것이 가슴 아팠는데, 이제는 더 볼 수 없어 자꾸 눈물이 났다. 다리를 다치지만 않았어도, 좀 더 건강하게 살아 계실 수 있었을텐데- 이제와 지난 얘기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지만 거동하지 못하는 할머니께 나는 너무나 무심한 손녀딸이었다. 좀 더 안아줄 것을,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을, 내가 꼭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할머니였는데, 나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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